【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②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저자 마커스 J. 보그
출판 비아
발매 2017.04.20.
02.문자주의를 넘어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성서 문자주의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받아 쓴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오류도 없는 무오한 계시라는 생각과 궤를 같이한다. 이렇게 믿는 교인들의 특징으로 저자는 몇 가지를 예를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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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오류가 없기 때문에 성서의 시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구와 우주의 역사가 대략 6천년이라고 계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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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등장하는 스펙터클한 사건 즉 노아의 홍수, 출애굽의 열가지 재앙, 둘로 갈라진 홍해 등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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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쓰여 있으므로 양성평등을 반대하며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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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성서 중 단지 몇 구절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기에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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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서의 몇 구절이 얘기하기 때문에 예수가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그리스도교만이 진정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완고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을 이루는 성서 무오설과 문자주의는 개신교가 시작할 때부터 있던게 아니라, 17세기 신학 저서에 처음 등장했고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퍼졌다고 한다.
현재 대다수 한국교회가 문자주의에 빠져 있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그 까닭은 문자주의를 접하게되면 성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수 많은 궁금증과 의문을 잠재우고, 마치 믿음이 부족하여 ‘의심의 죄’를 짓는 듯 불안하게 만들어 버리며, 더 이상 질문이란 걸 하지 못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것을 ‘지적 걸림돌’이라 부르며 이런 폐해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준다.
주류 성서학은 문자주의가 야기하는 지적 걸림돌 없이 그리스도교 언어를 더욱 풍성하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대안적 방식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해를 ‘역사-은유적 접근’이라 부르겠다.
이러한 역사적 접근은 새로운 이해의 빛을 가져다준다. 언어는 그 언어가 속한 상황과 맥락에서 생기를 띄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역사적 접근은 현대의 의미나 곧잘 오해를 일으키는 의미를 과거에 투사하는 것을 막아준다. 역사적 접근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편협한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접근법에 의해 질문이 바뀐다. 지금까지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물으며 그 답을 찾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성서에서 말하는 그 언어가 ‘그때 거기’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한 예로 구약과 신약성서 모두 노예제도에 대한 말씀이 있지만, 오늘날엔 성서에서 노예 제도 규율을 말했으니 노예 제도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없을 것이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언어에 대한 은유적 접근은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의미를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서에 나오는 대다수 이야기는 그 이야기들이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다 해도 은유적이다.
성서에는 오류가 없고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서 무오설과 문자주의를 내던지는 것이 두렵고 불안할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그것은 곧 확실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그리스도교인에게 이는 해방의 경험이다.
그렇다. 일부겠지만(^ㅇ^) '믿습니다'를 외치며 흑백논리처럼 천국 아니면 지옥만을 떠드는 교회의 행태, 상식적인 사고와 질문을 금기시하는 교계의 습성은 마치 무속신앙과 다름없는 교회를 만들어냈다.
저자는 이런 교회에 염증을 느끼는 많은 교인들에게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한 그 뜻과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깊고 풍부한 의미를 깨닫도록 몇 가지 그리스도교 언어를 통해 알려준다.
(계속)